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개요: 정치 체제 == || || ||[[파일:external/thekingdomiswithinyou.com/constantines-vision.jpg|width=100%]]|| ||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나타낸 그림이다. || 21세기 이후 대대적인 옛 로마권역 내 유물, 유적 발굴과 비문 해석 등을 통한 연구에서 발표되었듯, [[로마 제국]]의 국가정체는 2세기 후반 [[세베루스 왕조]]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치세 아래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프린키파투스(원수정)보다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새로운 원수정체, 즉 후기 로마제국 도미나투스(전제정) 모습의 원시적 형태인 후기 프린키파투스로 변모된다. 이는 [[군인황제시대]]로 불리는 3세기 이래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의 개혁 등을 거치면서 기원전 31년부터 서기 2세기 말까지 계속된 '황제와 원로원 간의 형식적 양두정체(diarchy)'에 기반한 프린키파투스의 그 본질이 변화된다. 따라서 원로원의 권한은 갈리에누스의 개혁 이래 유명무실화되었고, 이런 흐름은 [[아우렐리아누스]]가 자신을 태양신과 동일시하면서 내세운 권력 강화, 국가 통제 하의 배급품 배급과 생필품 전매제 시행, 황제를 최정점으로 하는 태양신 기반의 유일신교적 종교 체계 구축, 원로원 의원들의 유일신교적 종교 사제단 계서제 강제 편입 등을 통해 4세기 이후와 비슷한 개혁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러나 이런 변화 흐름은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혼란을 수습하고 중세 [[농노제]]와 비슷한 방법으로 국가 재건에 성과를 거둔, [[프로부스]] 황제 아래에서 잠시나마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후기 프린키파투스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프로부스는 어이없게 병사들의 폭동에 휘말려 페르시아 원정 중 암살됐고, 로마 제정은 프로부스 암살 이후 더 이상 프린키파투스를 유지한 황제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 3세기 위기 상황을 정리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년) 아래에서 대대적인 개혁이 벌어지면서, 로마의 정치 체제는 후기 제정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도미나투스(전제정)로 바뀐다. 이때부터 황제에게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었고, 황제가 머무는 황궁과 관련 기관들에는 황실예법[*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Proskynesis|Proskynesis]] 등을 참조하면 좋다. 이후 가장 이르면 유스티니아누스 때 혹은 그 이후에 나오는, 발가락에 신하들이 입을 맞춘다느니 하는 궁정예법의 시초가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다.] 등이 도입된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황제를 최정점으로 하는 고도화된 관료제와 황실 행정이 완비되고, 속주를 통한 지방행정 체계를 대체하게 된 관구(diocese)와 별도의 명령체계를 새롭게 만들어 이중체계로 구성된 새로운 지방행정 통제체계 등이 도입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불리는 이 새로운 개혁은 공화정 내전의 승리자가 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이상으로 큰 사건이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흔히 부르는 콘스탄티누스 마그누스 아래에서 보다 정교화, 고도화, 효율화된 제국 개혁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4세기 두 황제 아래의 개혁으로 만들어진 도미나투스는 후기 로마제국으로 부르는 4세기 이후 로마 제국에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제국의 황제는 당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권력을 누렸으며 때문에 권력 다툼도 심각했다. 그러나 제국은 점차 봉건화되었으며, 11세기 이후 동로마에는 서유럽 장원제도와 유사한 모양의 [[봉건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로마는 철저한 전제군주제와 그에 수반되는 방대하고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관료제]]''' 형태로 구성되었다. 동방 제국이 서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치와 경제적 번영 그리고 합리적 통치의 혜택을 본 것은 이미 3세기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부터였다. 제국 동방 지역에서는 군사적 능력은 좀 모자랐어도 통치 혹은 경제 운용에서 모자란 황제는 거의 없었던 행운을 맞았으며, 4~5세기부터는 일종의 숙군 사업으로 충성심 없는 야만족을 군대 바깥으로 쫓아내는 작업도 성공시키고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서로마와 비슷한 운명이 될 수도 있었다. 루피누스, [[가이나스]], [[아스파르]] 등 게르만-켈트계 장군·권신이 동로마에도 몇 있었지만 잠식되지 않았다.] 이런 기조는 5세기 말의 대혼란 시대에까지 이어졌으며, 제국은 이렇게 차근차근 유지되고 축적된 국력을 토대로 해서 6세기가 되면 서방의 게르만계 국가들에 대해 전면 반격으로 돌아서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